무협의 이모저모

[스크랩] 무협용어 소사전- 인물

칼의 춤 2008. 7. 7. 15:27

굴원(屈原 : 343? 277? B. C.)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 시인. 이름은 평. 원은 자. 회왕, 경양왕을 섬겨서 좌도, 삼려대부 등의 벼슬을 했고, 모략에 빠져 한때 방랑생활을 하다가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작품은 모두가 울분의 감정에 넘쳐, 고대 문학 중에 드물게 보는 서정성을 띤다. 초사에 수록된 작품 25편 중 , , 이 남아 있다.

귀곡자(鬼谷子)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 성씨, 사적 모두 미상인데, 그가 은신하던 고장 곧 지금의 산서성 택주부 내의 귀곡을 따서 호로 삼았다. 전국시대의 변설가, 병법가, 정치가로 유명한 소진, 장의의 스승이라고 한다. 무협소설에서는 기관토목술의 대가, 병법의 대가, 선도의 대가로 묘사된다.

 

노반(魯般)
중국 노나라 사람. 기계를 잘 만들어 나무를 깎은 새가 날았다고 한다. 성을 치는 운제를 만들어 유명해졌다. 기관토목술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후세에 공장(工匠)의 제신으로 숭앙받았다.

노자(老子)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 도가의 시조.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 초나라 사람. 주의 수장실의 이원으로 있을 적에 공자가 예를 배웠다 한다. 뒤에 난세를 피하여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의 수령 윤희가 도를 구하매, 도덕 오천언, 곧 을 지어 주었다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로는 공자보다 백년 뒤의 사람이라고도 하며, 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고, 도가학파의 형성 후 그 시조로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노화자(老化子): 늙은 거지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

 

달뢰대라마
티벳(서장)의 라마교(황교)의 교주. 정치, 종교 상의 최고 권력자로서 수도인 납살(라사) 부근의 포달랍궁(포타라궁)에서 살며 삼천여 개의 절과 30 40만의 중을 통솔한다. 초대 달뢰대라마는 황교의 개창자인 촌카파의 제자 게둔 둡으로 스스로 관세음보살의 화신, 곧 활불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제 3세에 이르러 홍교를 완전히 제압하였다. 제13세에 이르러 영국의 원조 아래 티벳의 완전 독립에 성공하였는데 현재의 달뢰대라마는 제14세이며, 중국과 대립, 1959년에 인도로 망명하였다. 계승자는 선대 라마의 전생자로서 갓난 아이 가운데서 뽑는다. 달라이 라마. 달라이는 몽고 말로 대양(大洋)의 뜻이다.

달마(達磨)
중국 선종의 창시자이자 중국 무술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신승 달마는 석가모니의 이십 팔대 제자인데 원래는 남천축에 있는 향지국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인도를 떠나 바닷길을 통해 동쪽으로 와서 제일 먼저 광동성의 광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불법을 전파하며 양자강을 건너 효명3년(527년 : 발타선사가 소림사를 떠난 뒤 불과 이 삼년 후인 시점), 소림사로 왔는데, 그때 그는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신통력을 보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일위도강'의 전설이었다. 달마는 숭산의 오유봉 위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면벽 구년의 수도에 들어간다. 깊이 두 장 반(약 7미터), 너비 한 장(약 3미터) 남짓한 이 동굴은 그로 인하여 달마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면벽 구년 동안 달마가 마주보고 앉았던 돌에는 달마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흰 돌에 좌선하는 달마상이 검은 색으로 찍혀진 이 '면벽석'은 높이가 석 자쯤 되는데 나중에 동배전(아미타전에 해당되는 소림의 전각)으로 옮겨져 유리상자 안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는 참선의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고 용맹정진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일련의 무공을 창조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과 이다. 달마대사는 후에(536년) 보리유지와 광통율사의 질투로 독살당한 뒤 관 속에 신발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에 인도에 갔다 오던 위나라 사신 송운이 인도로 돌아가는 사후의 달마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무산신녀(巫山神女): 무산에 산다고 전해지는 여신.

 

백거이(白居易 : 772 846)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 자는 낙천. 호는 향산거사. 대중적 작품 , 등은 문사, 서민들 간에 널리 애송되었다. 평이, 유려한 시풍은 원진과 병행되어 원백체로 통친된다. 시문집 이 있다. 백낙천, 백씨라고도 한다.

서왕모(西王母)
중국 상대에 받들었던 선녀의 하나. 성은 양(楊), 이름은 회(回). 주나라 목왕이 곤륜산에 사냥 나갔다가 서왕모를 만나서 요지에서 노닐며 돌아올 줄 몰랐다 하며, 또 한나라 무제가 장수를 원하매, 그를 가상히 여기어 하늘에서 선도 일곱 개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에는 그 모양이 반인반수로 표범 꼬리에 범의 이를 가지고, 더벅머리에 풀다리를 썼다고 한다. 그 여자의 남쪽에는 세 청조가 있어서 그 여자의 먹을 것을 마련하여 준다고 한다.
소동파(蘇東坡 : 1036 1101)
중국 북송의 문인. 이름은 식. 아버지 순, 아우 철과 더불어 삼소라고 불리우며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왕안석과 대립하여 좌천되었으나, 후에 철종에게 중용되어 구법파의 대표자의 하나가 되었다. 서화에도 능하였다. 저서에 , 이 있다.
시황제(始皇帝)
중국 최초의 통일적 대제국을 세운 진(秦)나라의 제1대 황제. 장양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정(政). 13세에 진왕, 23세에 친정, 이후 16년간에 열국을 멸하여, 기원전 21년에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다. 군현제를 채용하고, 도량형, 통화, 문자를 통일하는 등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분서갱유에 의한 사상통제, 만리장성 증축 및 아방궁의 건설 등으로 위세를 크게 떨쳤다. 진시황.

유방(劉邦) 항우와 싸워 한(漢)나라를 연 고조(高祖)를 말한다.
이백(李白 : 701 762)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 촉땅 사천출신.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흥이 나면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재시인이었다. 두보와 더불어 시종(詩宗)이라 한다.
장삼봉(張三峰) , 장삼풍(張三豊)
무당파의 개파조사 장삼봉의 도호가 삼풍진인(三豊眞人)이었기 때문에 장삼풍이라고도 한다. 무당파의 개파조사로 혹은 오호십육국 시대의 양나라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송말 원초 때의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키가 컸는데 어렸을 때는 소림에서도 공부한 일이 있다고도 하며, 소림문하를 벗어난 후 천하를 유람하던 중 무당산에 이르러 영기가 어린 세 봉우리를 보고서 마침내 득도하여 무당파를 개파하였다고 한다. 사서에는 삼봉진인에 대하여 수백년에 걸친 행적이 전하여지고 있어 이를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여러 신선들의 행적을 후대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묶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에서는 삼봉진인이 해시의 도술을 익혀 잠시 육신을 떠났다가 다시 부활하여 나타나곤 하였으므로 수백 년의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자(朱子 : 11301200)
중국 남송의 큰 유학자. 이름은 희, 자는 원회 또는 중회. 호는 회암, 회옹, 운곡노인, 창주병수, 돈옹 등이라 하였다. 안휘성 휘주 사람. 시호가 문공이기 때문에 주문공이라 일컫기도 하며, 주자학을 처음 시작한 대철학자이다. 정호, 정이의 학설을 믿고 그것을 다시 더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정주학이라 하며, 성(인간성)과 리(진리)의 연구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성리학이라고도 하며, 철학으로서는 리(원리)와 기(현상)의 문제를 연구하였기 때문에 이기지설이라고도 한다. 저작이 매우 많아서, 모든 경서의 풀이는 물론, 59권, 등이 있다.

출처 : 나의 자유, 나의 블록
글쓴이 : Egaeni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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