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의 이모저모

[스크랩] 나의 十八技 수련기(3)-신비속의 무술 18계

칼의 춤 2008. 7. 7. 15:14

 


18기(十八技)는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중국이 그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18기란 용어는 정조때(1596)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데 기록을 보면 1596년부터 200여년에 걸친 오랜 기간동안 조.중.일 동양3국의 무예중 가장
우수한 무예를 집대성한 것으로 종래의 무예제보(武藝諸譜)에다 새로운 무예 12기를 합쳐
18기로 호칭했다고 되어있다.
총4권으로 구성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창술(槍術),본국검(本國劍),수박(手膊),마술(馬術) 등
의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중국무술고서인 척계광의 기효신서(記效新書)를 기초로 하고
명나라의 권법가들을 초빙하여 자문을 구해 도보를 완성했다고 기록된것을 보면 우리의
18반 무예가 중국18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미루어 알수 있다.

18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졌다.
1945년 해방직후 중국대사관에 국술부(國術部)가 생기면서 몇몇 한국인에게 18기를 가르
치게 된것이 첫 시발점으로 이후 한화국술관(韓華國術館)이 설립되고 점차 무술관이 늘어
나면서 중국무술(中國武術) 또는 줄여서 그냥 '궈슈(國術)'라고 불렀다.
무술스타 이소룡이 쌍절곤(雙節棍)을 휘두르며 허리우드 영화에서 맹활약하던 1980년대에
'쿵후(KUNG-FU)' 라는 이름이 유행했다.
쿵후는 공부(功夫)라는 영어 표현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뜻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우리의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차기 올림픽종목 채택을
노리는 중국국술은 '우슈'라는 이름으로 또 한번 변신한다.
우슈는 무술(武術)의 중국식 발음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중국무술을 18기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중국인들은 없으며 지금은 우슈로
통일되어 내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활발한 보급이 이루어 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이 무술을 배울때는「18계」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18기의 변형된 이름
이였지 않은가 싶다.


(마식보(馬式步)는 각 유파에 따라 다르며 그 명칭도 천자마식(川字馬式),사평마식(四平馬
式),사평보(四平步),마보법(馬步法)등 여러가지가 있다. 또 고(高),중(中),저(低)식 등으로
나누어 지나 지금은 모두 기마식(騎馬式)으로 통칭한다. 기마식은 태권도 등 다른 무슬에서
도 맨 먼저 배우는 것으로 지구력과 하체단련을 위한 참춘법(站椿法)의 일종이다. 호흡에
의하여 기공(氣功)을 단련할때는 한번 내쉬고(呼) 한번 들여 마시는(吸) 일식(一息) 동작을
반복하는데 이를 토납(吐納)이라 한다. 마식참춘(馬式站椿)에 있어 토납의 기(氣)는 먼저
단전(丹田)에 근원을 두고 그 흐름이 임맥(任脈),독맥(督脈)등 소위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돌아 일주천(一周天)하여 다시 단전에 모인다. 이를 기침단전(氣沈丹田)이라하여 18기무술
의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기마식때 가장 주의할것이 허리를 길게 펴고 가슴은 함축하고
배는 오무려 기의 순환로인 척추가 일직선이 되도록 해야 함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 둔부를 뒤로 길게 빼는 모양을  취하는데 가장 잘못된 자세로 도장에서는
이를 교정하기 위하여 길다란 막대기로 수련생의 머리,등판, 둔부를 받혀서 수직이 되도록
자세를 고쳐준다. 기마식때 양 발끝을 안으로 모으는 것은 당랑권의 독특한 참춘법이며
소림이나 형의권등에서는 발끝을 나란히 되게하거나 밖을 향하여 벌리는등 여러가지 자세
가 병용되고 있다,
위의 자세는 마보충권(馬步衝拳)으로 형의권(形意拳)에서 많이 볼수 있는데 등산식에서
전사경(轉絲經)을 이용하여 마식보로 바꾸면서 우측 천심권(穿心拳)을 처내는 초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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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남(金大南) 형(兄)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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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토건이 강동면 모전에서 우리 언별리까지 도로신설 토목공사를 할때 건설현장에 나와
있던 대남 형을 처음 만난것은 청도관을 그만두고 야와라 도장에 다니던 한참 후쯤이였다.
그때 우리 농고 학생들은 유행처럼 18계를 배우는 붐이 일어났었을 때였는데 내가 야와라
도장에 다니는 것을 모르는 친구들이 자꾸만 권유하여 어느날 그들이 운동하는 화부산으로
따라갔다. 그곳에는 우리학교 학생들만 한반이 되어 열 대여섯명이 배우고 있었다.
사범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포남동에 살고있는 농고 선배되는 사람이라 했다.
1주일에 월.수.금.3일을 운동하는데 야와라 도장시간과 겹치기가 되어 늘 불편한 상황이 되
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바로 아랫집 친구가 읍내에서 18계 고수가 왔으니 만나보라고 해서 일찍
저녁을 마치고 내려갔는데 그날 어섬프레한 달빛 아래서 옷자락을 펄럭이며 연무시범을
보이는 대남형의 모습은 이제 막 18계에 입문한 내게는 경이 그 자체였다.
몸을 솟구쳐 차내는 이중발차기는 허공을 갈랐고 원을 그리며  땅바닥을 휩쓰는 발끝에는
훅 소리와 함께 마당의 짚프라기가 어즈러히 흩어졌다.
그 동작이 얼기규(二起脚 이기각) 쑈우탕튀(掃堂腿 소당퇴) 초식이라는 것은 먼 훗날
알았지만-

화부산 운동을 그만두고 그에게 본격적인 18계 수련을 시작했다.
허식(虛式),탄퇴(彈腿),나오식,권추(捲抽),추퇴(揪腿)등 기본식과 소령권 12단, 단식풀이,
그리고 단권형(短拳形)등 지금 기억해 낼수 있는 이름들인데 한가지 동작을 배우면 최소한
1주일넘게 이를 계속 반복수련하여 숙달돤후 라야만 다음 동작을 가르켜 주었다.
대남 형은 친한 형이자 개인교습을 받은 최초의 사부(師父)이기도 했다.
운동시간에는 한없이 엄격했지만 끝나고 나면 함께 손을 잡고 멧둔지에 나란히 앉아 이런
저런 얘기에 시간 가는줄 몰랐다.
그는 내 무예수련의 일대기에 있어 잊을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피튀식(臂腿式)은 좌우 양다리와 신낭(腎囊)을 모두 바닥에 붙이는 일자마(一字馬) 자세
로서 하체관절을 유연하게 하고 다리근육을 이완시켜주는 동작이다. 초심자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자세로 먼저 압퇴(押腿)나 류퇴(留腿)를 완전히 익힌 다음 일자마로 들어가
야 함으로 많은 수련이 요구된다. 실전에서도 적의 공격에 급격히 몸을 낯우어 피하는 방어
초식으로도 활용되는데 무협영화같은 곳에도 자주 등장한다. 도장에서 연무때는 '피�' 이
라고 구령을 붙이곤 했는데 아마도 벽퇴의 다른 명칭을 벽차(劈叉)라고도 하므로 이의 중국
식발음이 '피차'인 관계로 유사하게 변형된 탓인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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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철(李奉哲) 명인(名人)에게 사사(私師)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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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대남 형이 말했다.
"글쎄 자기용을 훌쩍 뛰어 넘더라니까. 손끝으로 다섯치 두께가 넘는 송판을 단박에 뽀개
는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바로 당랑권 노사(老師) 이봉철 명인이였다.
내가 이 명인을 만난것은 1965년 늦은 봄이였다.
그날 대남형이 자신의 사부라며 우리마을로  모시고 왔을때 첫눈에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형형한 눈빛은 사람의 심장을 꿰뚤을듯 빛났고 조금 여윈듯한 몸에서는 날카로운 예기(銳
氣)가 풍겼다. 첫눈에 고수임을 누구나 짐작할수 있었다.
그때 이 명인이 무슨 사연으로 우리 마을같은 오지로 내려 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한
동네 친구집에 기거하면서 유독 나만을 제자로 받아들인것은 엄창난 기연(奇緣)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봉술(棒術)이라 일컫는 18기 무기술을 구경했다.
팔랑개비 처럼 사방팔방 휘돌리는 두팔 정도 길이의 봉은 무수한 그림자를 뿜어내며 명인의
몸을 감추었고 이따금 바닥을 치는 맹열한 타격속에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팔괘오랑곤(八卦五郞昆)의 만천화우(滿天花雨) 초식이였다.

사사 받기 시작한지 보름정도 지났을 무렵 대남형은 자신이 지도하던 제자 한명을 스승인
이명인에게 보냈다. 나 혼자 수련하는 것은 연습상대가 없으므로 비효율적이라 여긴 모양
이었다. 그가 바로 운산에 사는 농과 '권혁우' 친구였다.
매일학교가 끝나고 우리 둘은 뒷냇가 공터에서 명인의 지도하에 열심히 수련에 들어갔다.
혁우 친구는 골격이 튼튼하고 반사 신경이 뛰어나 같은 동작을 배워도 언제나 나보다 숙련
도가 앞섰다. 탄퇴를 찰때 방어하는 그의 팔뚝에 부딪치면 발목이 시큰 거릴 정도로 충격이
올 정도였다. 명인을 사부로 모시고 함께 운동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같은 동문사형제
(師兄弟)로서의 끈끈한 정은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있다.
혁우 동문은 나중 이 명인이 떠나고 난후 다시 대남형에게서 오랜기간 수련을 계속하여
상당한 무공실력을 �은 것으로 알고있다.

이 명인은 약 4개월 정도 우리 마을에 머물렀다.
운동이 끝나고 같이 땀흘린 몸을 냇물에 씻으면서 명인은 많은 무술사(武術史)를 일러주었
다. 그때 처음으로 18계가 아니고 18기라고 한다는 것과 사오린(少林)이니 무당(武當)이니
탕랑(螳螂), 파과(八卦), �쿠얀(少虎燕)장권 등의 권법의 흐름과 기예등을 알게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나중 어떻게 하던 18기의 정수(精髓)를 꼭 배우고 말겠다는 흔들림없는 결심
을 심어주는 Motivation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후일 고단자가 되고 도장에서 관원들을 지도하는 사범의
위치가 되자 이론적 지식이 필요하여 각종 무술서적들을
탐독할 즈음 우연히 이봉철 명인이 역(譯)한
「적요격투기(摘要擊鬪技) 」무술서를 접했을때 그 감회
는 남달랐다.
적요격투기는 당랑권의 공격초식만 뽑아서 정리한 것으로
18기 격투술의 대표적 저서라고 할수있다.
적요권(摘要拳 :쪼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다루
어 볼 생각이다.

출처 : 소요재에 걸린 구름
글쓴이 : 소요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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