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그가 딱히 주정뱅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강인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술 도매상은 자신의 점포의 입구에서 진을 치고 며칠 이고 앉아있는 골칫덩이를 그녀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를 딱 잘라 거절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항주에서 거래되는 모든 술의 팔 할을 독점하고 있는 도매상 늙은이의 반갑지 않은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사내의 형형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한번 보름 동안 지켜보도록 하세요. 채용 여부는 그다음에 결정하도록 하죠.”
초선화는 동행한 지배인에게 말하고, 가마에 올라탔다.
“이름은?”
지배인이 사내에게 총총히 다가가 허리를 구부리며 물었다.
“그런 거 없소.”
사내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사내의 입에서 싸구려 탁주냄새가 풀풀 풍겼다.
“별명이라도 있을 것 아뇨? 없으면 하나 만들어 내던가? 일단 보름을 일하게 되었으니, 이름이든 별호든 있어야 장부에 올려 급료를 줄게 아니겠소?”
지배인은 짜증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는 뭔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저 일당백이라고 하더군.”
“오호- 거참 대단한 자신감인데?”
지배인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묘한 경멸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담겼다. 네까짓 게 어떻게 일당백이냐 하는 조소였다.
사내는 지배인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배인의 조소를 짐작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그런 것 없소. 그저 일당 백전이면 무슨 짓이든 한다고 해서 별호로 붙여졌을 뿐이오.”
“일당 백 전, 일당백이라.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당 백 전이요?”
의아한 얼굴로 지배인이 물었다.
“백 전이면 독한 백건아가 한말이라!”
사내가 말했다.
‘이 자식 술을 좋아하긴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군.’ 라고,
지배인이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내가 지배인 향해 고개를 들고 무엇인가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형형한 안광이 불쑥 눈앞에 다가오자 지배인은 마치 불에라도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잠시 주춤했다.
사내가 지배인에게 내민 것은 낡고 비루한 호리병이었다.
“나를 쓰시려거든 여기에 술이나 한말 담아 주시오.”
호리병을 받아들고, 지배인은 황당해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한말은커녕 한 되도 겨우 담을까 말까 하거늘?’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지배인이 말했다.
“아무튼 갑시다. 명색이 기루에서 술 한 병 못 내어주겠소? 가서 한 말이든 한 항아리든 담아 드리리다.”
사내는 아무런 말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를 데리고 기루로 돌아온 지배인은 과연 작은 호리병에 술 한말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것을 보고 크게 의아해 했다.
사내가 촉석루에서 호법으로 일을 하게 된지 어느덧 오년이 흘렀다.
사내는 유약한 문사(文士)나부랭이 같이 생겼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완력은 놀라웠고 그 덕에 크고 작은 시비는 곧 사라졌다. 몇 번이고 기루 앞에서 누군가의 사주로 보이는 괴인들과의 크고 작은 시비가 있었지만 모두 사내에게 간단히 제압당했다.
사내는 언제나 칼을 차고 있었지만 한 번도 칼을 뽑아들게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루는 날로 번창하였고 이후 사내는 촉석루의 경비를 책임진 총호법이 되었다.
사내는 늘 말이 없었고, 늘 취해 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거나 실수 따위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늘 취해 있었지만, 늘 단정했다. 사내는 밤이면 독한 백건아가 가득 담긴 호리병을 들고 달을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망연히 달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슬픔이 배어있었다.
대체 그는 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추억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서러운 운명을 저주하는 것일까.
촉석루에 모든 기녀들은 그것을 가장 궁금해 했다.
알게 모르게 촉석루의 기녀들은 망연히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내의 뒷모습에 매료되어 갔다. 아니 젖어 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들은 사내의 뒷모습에서 자신을 기루에 팔아버리고 돌아서는 등이 굽은 가난한 아비의 슬픈 뒷모습을 보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소년의 애잔한 뒷모습을 보았으며, 또 어린 나이에 뭇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고 교태를 팔고 몸을 파는 자신들의 등에 무겁게 지워진 슬픔을 보았다.
기녀들은 모두 사내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늘 말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함부로 곁을 주지도 않았다.
사내의 뒷모습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하는 그의 뒷모습은 그래서 더욱 애틋했고 가슴 저렸으며애잔했다.
그러한 그에게 무한(無限)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쏟아 붓는 단 한명의 여인이 있었다.
언제나 사내를 보면 냉큼 달려가 그의 등에 머리를 쿡 박고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 키가 작은 여인,
소홍(蕭紅)
일곱 살 어린 그녀는 사내가 촉석루에 호법으로 일하게 된, 바로 그해 노름꾼 아비의 손에 이끌려 기루에 팔려왔다.
비정한 아비는 딸을 기루에 넘기고 돈을 받아 챙기고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런 아비도 아비라고, 늘 아비를 부르며 숨죽여 울던 어린 소녀는 어느 밤 뒤뜰을 서성이며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빠, 아빠 반가이 부르며 달려들었다.
소녀는 사내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고 또 울었다.
그날 밤 사내는 소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를 업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단소홍은 기루에서 유일하게 사내의 지근에서 그와 격 없이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늘 무표정하던 사내도 소홍을 보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오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열두 살이 된 그녀도 다음 달이면 정식 기생이 되어 손님을 받을 예정이었다.
이제 자신도 다음 달이면 다른 기생언니들처럼 돈을 벌어서 가난한 집의 살림을 도울 수 있게 됐노라고 말하며 소홍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곤 했다.
어느 날 기생 언니들의 심부름으로 입술연지를 사러 시장에 나간 소홍은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소홍은 오래된 부두의 빈 창고에서 발가벗겨진 체로 발견되었다.
양 팔목과 두 다리가 부러져 있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목숨을 잃은 것 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어린 소녀의 육체는 어느 탐욕스러운 변태 색마(色魔)에 의해 갈가리 찢기고 유린되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항주의 불량배들을 일일이 족치며 범인을 잡아내려고 했지만 범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게다가 불행은 손을 맞잡고 함께 온다고 하던가.
그녀의 부러진 팔다리의 뼈가 겨우 아물었을 즈음 소홍은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손을 써보기에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소홍은 열세살 어린나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저 어린아이로 알았던 단소홍은 주위해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강인했다.
그녀는 아픔을 툭툭 털고 일을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이제 생계를 도와야할 가족들과 부양해야할 자식까지 생긴 때문이었다.
소홍은 촉석루의 여주인 초선화의 젊은 시절을 무색케 할 만큼 아름답고 요염했다.
그녀는 곧 제2의 초선화라 불리며 항주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녀를 한번 품어보기 위해 논과 밭을 팔아대는 멍청이 들이 줄을 이었다.
소홍 역시 초선화처럼 사내들을 믿지 않았고, 사내들에 의해 결코 속박당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소홍은 자신을 지명한 지역유지의 생일 만찬에 갔다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주요 귀빈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 순무(巡撫:지방장관)의 아들이 바로 그녀를 범한 강간마였던 것이다. 소홍은 그를 보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장에서 행인들에게 부딪혀 넘어진 소홍,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던 사내의 저 가증스러운 미소.......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소홍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저자가 저를 강간했습니다. 억울함을 밝혀주소서.”
소홍은 순무(巡撫)의 아들을 관청에 고발했다. 소홍은 무명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관청의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역시 이 시대에 포청천은 없었다. 그녀의 고발은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무고로 몰려 소홍은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소홍은 끝임 없이 억울함을 호소했고, 꽤 공명정대(公明正大)하기로 소문난 순회관리가 그녀의 고변을 다루어 재판을 해주겠노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물러나 촉석루로 돌아오던 소홍은 그만 등에 칼을 맞고 절명하였다. 고발자인 그녀가 죽자 재판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녀가 죽은 지 49일째 되던 날, 시장 통에 변발한 아홉 개의 머리통들이 잘려진 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 시각 순무의 사택에서는 순무의 아들과 평소 그와 어울리던 아홉 명의 불한당들의 몸뚱이가 머리를 잃고 흥건히 피를 쏟은 체 널브러져 있었다.
촉석루의 사내는 소홍이 낳은 아기를 데리고 사라졌다. 사내는 아기에게 일당천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끝내 순무는 아들의 머리를 찾을 수 없었다.
[%%%참고%%%]
순무[巡撫]는 명, 청 시대의 벼슬로 지방장관. 명나라는 처음에 도지휘사(都指揮使)·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 등을 두어 각각 지방의 군사·행정·감찰 업무를 분담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기부터는 새로이 순무가 설치되어 포정사 등의 위에서 지방장관의 실권을 차지하게 된다. 청나라 때는 순무가 1개 성(省)을 지배하게 되어 1∼3개 성을 관할하는 총독(總督)과 함께 황제에 직속되어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며, 상주권(上奏權)·성례제정권(省例制定權)·문무관 임면권(任免權)·군대절제권(軍隊節制權)·지방 재정감독권·지방 최고재판권 등 봉건제후와 같은 권한을 가졌다. 단 순무가 총독 밑에 하위의 직책은 아니고, 상호보완의 대등한 관계.
'판타지소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계지仙界誌 표지 -송명의 신작 (0) | 2013.01.10 |
---|---|
a1 (0) | 2008.10.16 |
취야잡설1 (0) | 2008.07.29 |
취야잡설3 (0) | 2008.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