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구르카족과 쿠크리

칼의 춤 2009. 11. 23. 04:53

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 작은 체구의 동양인들이 용병으로 배속된 일이 있었다. 그들을 본 영국장교는 "저따위 야만인들이 이런 전쟁에서 뭘 할 수 있어! 참호나 파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영국군 장교는 자신의 막사를 나오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막사 바로 앞에 금방 잘린 듯한 독일군 병사들의 목 십여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교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용병들이 밤사이 나가 잘라온 것이였다. 그들이 바로 네팔 구르카 출신의 전사들이었다.


일본으로 입성 중인 구르카족 라이플연대(1946년 5월)

2차 대전 중 구르카족 용병들의 쿠크리에 목숨을 잃은 독일군의 수는 웬만한 대공급의 피해와 맞먹는다 할 정도로 그들의 악명은 높았다. 그리고 그 때문일까? 구르카족이 사용하던 단검은 무기로서 칼을 언급할 때 언제나 수위를 차지한다.

지금도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영국에서는 꽤 오랫동안 연대 규모의 구르카족 부대를 운용했다. Britsh Indian Army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편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Subedar Major/ Major (Queen's Gurkha Officer)
Subedar/ Captain (Queen's Gurkha Officer)
Jemadar (now Naib Subedar)/ Lieutenant (Queen's Gurkha Officer)
Company Havildar Major/ Company Sergeant Major
Company Quartermaster Havildar/ Company Quartermaster Sergeant
Havildar/ Sergeant
Naik/ Corporal
Lance Naik/ Lance Corporal
Rifleman


싱가폴 Gurkhas Contingent(지금도 구르카족의 명성은 높다)
쓰고 있는 모자는 구르카족의 상징과도 같은 Hat Terrai Gurkha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쿠크리를 몸에 지니고 있다



쿠크리Kukri

구르카족으로 인해 알려진 쿠크리 단검은 실용성이 무척이나 높다. 바로 잡아도, 역수로 잡아도 언제나 상대방을 상대하기 좋도로 되어 있으며, 뼈 등을 잘라내는 것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한다.

쿠크리를 보면 날의 앞부분이 약 20도 가량 앞으로 구부러진 모양으로 마치 부메랑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던진다고 돌아오지는 않는다.

또한 손잡이 쪽으로 내려오면 날 부분에 홈이 하나 나 있는걸 볼 수 있는데 "kaura"또는 "cho"라 부르는 이것은 주술적인 면도, 실용적인 면도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적의 칼을 막았을 때 일종의 잡는 역할을 수행할 수 도 있으며, 피가 흘러와 손잡이가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피홈의 역할도 한다. 또한 그 생김새가 여성의 성기 모양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힌두교의 파괴의 여신 칼리kali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투력이 상승한다고 믿는다.


 



쿠크리의 연원은 보통 그리스 쪽으로 생각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그리고 인도 등지를 돌면서 퍼뜨린게 아닌가 하는데, 사실 그 이전에 이집트에서 넘어가 그리스에서 발전하고 다시 인도 쪽으로 넘어와 현재의 쿠크리를 있게 한게 아닌가 한다.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자료를 찾아보면서 갖게된 개인적 의견이 많으니 확실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분은 직접 조사해 보실 것을 권한다.

고대 이집트의 Khopesh

이집트에서 발생한 한날칼, 코페쉬. 낫을 연상시킨다.


Khopesh


그리고 그리스로 넘어오면 kopis가 나오는데 이는 이집트 khopesh를 흉내낸 듯 보인다(이름도).

그리스 kopis

거의 쿠크리와 동일한 생김새


그리스 Machaira

사실상 마카이라와 코피스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도 하는 듯.


로마 Falcata

후에 로마는 병진을 구성하게 되면서 베기에 좀 더 특화되어 있는 Falcata 형식을 버리고 gladius 형태로 진화한게 아닌가 보여진다.


방패로 막고 글라디우스로 찌르는, 찌르기에 특화된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



쭉 나열해놓고 보면

이집트 Kophesh-> 그리스 kopis -> 그리스 Machira -> 로마 Facata, 네팔 Kukri, 그리고 로마는 찌르기 형태로 글라디우스로 변화로 보인다. 사실 쿠크리와 같은 형태는 다용도이다. 네팔에서는 전투에서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나무도 베고, 풀도 베고, 가축도 잡는 일상생활 용품쪽에 가깝다. 하지만 로마쪽에서는 갑주가 발달해가며 베기보다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찌르기 형태로 발전해간게 아닌지. 고수분들 보시면 조언 좀 해주시길...

 

 

 

ㆍ英, 네팔인 퇴역용병에 조건없이 영주권 인정

전직 구르카 용병인 락시만 구룽이 지난달 24일 영국 런던 의회 앞에서 자신이 받은 훈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영국 정부가 1997년 이전 전역한 구르카 용병의 영국 정착에 까다로운 조건을 달자, 전직 구르카 용병들은 이날 의회 앞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런던 | AFP연합뉴스>

“구르카가 온다!”

지난달 29일 영국 의회에서 네팔 구르카족 용병의 영국정착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자, 퇴역 구르카 용병들과 이들을 위해 캠페인을 벌여온 배우 조안나 럼리는 이렇게 외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200년 동안 영국군의 선두에서 용맹을 떨쳐온 네팔 구르카족 용병들이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몇해에 걸쳐 영국 정부를 상대로 벌여온 지난한 ‘투쟁’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생계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용병에 자원할 수밖에 없는 빈국 젊은이들의 아픔도 깔려 있다.

네팔인이지만 영국을 위해 싸우는 구르카 용병

구르카 용병은 1816년 영국과 네팔 간 전쟁이 끝난 후 구르카 부족 전사의 용맹을 높이 산 영국 측이 구르카 포로 가운데 일부를 영국 동인도회사의 사병으로 편입시키면서 시작됐다. 영국 측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네팔 전투원들이 강한 전투력을 보이자, 영국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후에 영국군으로 통합됐다. 1·2차 세계대전 때는 연인원 20만명의 구르카 용병이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이중 4만5000명이 전사했다. 지금도 구르카 용병 3500여명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영국군 현역으로 복무 중이다. 구르카 전사는 영국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군대와 싱가포르 경찰 등에서도 일하고 있다. 퇴역 후 사설 경호회사에 고용돼 전장에 다시 뛰어들기도 한다.

초기 영국군 소속의 구르카 용병은 대부분 네팔 산악지역 ‘고르카’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었다. 구르카란 이름은 지역명에서 온 것이라는 설과 8세기 힌두 전사 ‘구루 고라크나스’에서 유래됐다는 해석이 있다. 산악지방 출신인 구르카 용병들은 탁월한 체력과 엄격한 규율로 무장해 ‘정글 전투의 1인자’ ‘백병전의 1인자’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

영국군에서 이들을 선발하는 절차는 혹독하기로 악명 높다. 히말라야 산기슭의 가파른 경사길 5㎞를 등에 25㎏짜리 돌무더기를 진 채 55분 안에 주파해야 한다. 1분에 벤치점프 75개, 2분에 윗몸일으키기 70개를 해내야 한다. 용병으로 선발된 구르카의 모토는 ‘겁쟁이가 되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다’다. 이들은 ‘쿠크리’로 불리는 약 45㎝ 길이의 전통 칼을 갖고 전투에 임하는데 ‘쿠크리를 한 번 뽑으면 칼집에 넣기 전에 반드시 피맛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엔 영국군 용병 200명을 뽑는 데 2만8000여명의 네팔 젊은이들이 지원해 140 대 1의 경쟁률을 보일 만큼 영국군 용병자리는 네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네팔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데다 용병의 연봉이 높기 때문이다. 과거엔 용병의 임금이 영국 정규군의 연봉보다 훨씬 낮았지만 요즘에는 같은 2만4000달러(약 3000만원)를 받는다. 이는 네팔인 평균연봉보다 50배 이상 많은 액수다.

네팔 정부는 자국 젊은이들이 외국주권 보호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라며 마땅치 않아 하지만, 구르카 부족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역에서 뛰는 용병의 임금과 전역자들이 받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부양가족들을 고려하면 구르카 용병은 네팔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인정받은 공로

홍콩에서 주둔하던 구르카 부대는 1997년 1월1일 영국으로 옮겨왔다. 같은해 영국 정부는 홍콩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구르카 용병들에게만 영국 영주권 신청 자격을 주기로 했다. 97년 이전 전역한 용병들은 영국에 거주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영주권 신청 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 “모든 구르카 용병의 영국 거주를 허용하면 이민정책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라며 “영국은 그럴 형편이 안 된다”고 밝혔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 정규군에 비해 훨씬 낮은 연봉과 연금을 받아왔다. 97년 이전에는 모든 용병이 군을 떠나면 네팔로 돌아가야 했다. 이 때문에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구르카 용병들은 늘어났다. 영국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소총병이었던 구르카 용병 ‘푼’은 퇴역 후 네팔의 작은 언덕마을로 돌아와 자녀 여섯을 키우며 살았다. 그는 수도와 전기시설도 없는 좁은 오두막에서 적은 연금을 갖고 생활했다. 심장병·당뇨·천식 등으로 건강이 나빠졌지만 치료약을 제대로 구할 수 없자 영국에 영구정착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역시 구르카 용병이었던 ‘지아랜드라 라이’는 전투 중 폭탄 파편으로 등에 큰 부상을 입어 군을 떠났다가, 치료를 위해 영국 입국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영국군의 선봉에 서서 영국을 위해 싸웠던 이들에게 영국 정부가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비판 여론은 점점 커져갔다. 2005년 구르카 용병들이 불평등한 처우에 대해 항의하자 영국 정부는 97년 이후 퇴역한 구르카 용병의 연금을 한 달 95파운드(20만원)에서 450파운드(90만원)로 인상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에 해당되지 않는 퇴역 구르카 용병 1만500명과 그들의 가족 5000명은 연금을 받지 못한 채 ‘구르카 복지자선기금’에서 나오는 월 6파운드(1만2000원)로 생활했다. 대부분이 2차대전에 참전했던 이들로 80세 이상의 고령자였다. 구르카족 지원단체들은 정부정책에 항의하며 소송을 냈고, 영국 법원은 지난해 9월 정부의 기준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97년 이전 전역한 용병에게도 영주권 신청 자격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가족이 영국에 거주하고 훈장을 받은 경우’ ‘부대에서 20년 이상 복무한 경우’ 등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구르카 용병 지원단체들의 정부 비판이 더욱 거세지자, 영국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은 조건없이 정착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의회는 지난달 이 법안을 승인했다. 용병지원 캠페인을 벌여온 단체와 배우 럼리는 “정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국방 전문가 찰스 헤이먼은 “구르카는 영국 역사의 일부다. 영국과 관련된 전쟁을 떠올리는 사람은 누구나 구르카가 영국 편에 서서 싸웠던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영국과의 싸움에서 적국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구르카 용병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