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취야잡설1

칼의 춤 2008. 7. 29. 12:59
달빛을 받고 서있는 노인의 여윈 등은 서늘했다.

노인은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고, 보름밤이면 마당에 서성이며 망연히 달을 보고 서 있었다.
노인은 내 사부(師父)이며 양부(養父)이다. 그가 내게 일당천(一堂千)이라는 성과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껏 나를 키워 주었다.
노인이 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고작 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노인과 누룩을 사러 시장에 나갔을 때 나는 젊은 여자의 등에 업혀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쓰는 나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들을 무수히 목격하였다.
어떤 아이는 젊은 남자의 목에 목마를 타고 빙당호로를 쪽쪽 빨고 핥으며, 그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칭얼거림도 없이 내내 두발로 걸어서 산에서부터 내려왔다.
빙당호로는 지금껏 일곱 살 일생에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젊은 아비의 목 위에 올라탄 녀석을 올려다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곁에서 상인과 물건 값을 흥정하고 있던 노인의 손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한참 만에 노인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손가락으로 목마 탄 아이의 빙당호로를 가리키며 ‘아빠. 아빠.’ 라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절실하게 달콤한 빙당호로와 어리광부릴 아빠가 필요했다.
내 손가락을 쫓아 목마 탄 아이와 빙당호로 그리고 다시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노인의 얼굴.......
슬픈 것 같으면서도 당혹스러운 노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노인은 빙당호로를 나에게 사주었으나 이후 혹시나 노인이 나의 아버지 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접어 버렸다. 노인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더운 살을 부비고, 무작정 떼를 부려도 받아줄 같은 피가 흐르는 친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인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더욱 노인을 동경했다.
노인은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다. 취한채로 달을 바라보는 노인의 뒷모습은 언제나 서늘했고 야위어있었고 슬퍼보였다.

내가 아비에 대한 일말에 기대를 버리고나서 오래지 않아서다.
어느 날 아침, 나팔꽃이 아직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노인은 내게 여윈 등을 보이며 처음으로 자신의 등에 업히라고 했다.
내가 주저하며 노인의 서늘한 등에 업히자, 노인은 끈으로 나와 자신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나를 등에 업고,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업힌 노인의 등은 결코 야윈 등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술에 취해 달을 바라보는 그의 등은 한없이 야위게 느껴졌던 것일까.
나무가 휙 지나가고, 순식간에 숲이 휙 지나갔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속도였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나는 어찌나 속이 울렁거리던지, 노인의 등에 토사물을 쏟았으나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저 앞에 있던 산이 한순간에 등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노인의 등에 업혀 잠이 들었다. 서늘하던 노인의 등에서 땀 냄새와 내가 토한 토사물의 섞인 야릇한 냄새가 났지만 나는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침 먹은 것을 게우고 기운이 없어서 일게다. 나는 꿈을 꾸었다. 노인은 한달음에 강물을 건너뛰었다. 훌쩍 산 같은 바위를 뛰어 넘고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건너고, 넓은 들판에 펼쳐진 풀들을 살포시 밟으며 허공을 가로 질렀다.
얼마를 달렸을까. 내가 얼마나 잔 것일까.

나는 풀밭에 뉘여 져서 잠들어 있었다.
부스스 눈을 뜨고 노인을 찾았다. 노인은 저만큼 보이는 개천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노인은 내가 깬 것을 알자 물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내게로 걸어왔다.
노인은 성기가 길게 늘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내게 다가온 노인은 나를 발가벗기고 개천으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목욕을 마치고, 노인이 자루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나는 속이 좋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내게 노인은 내게 빙당호로를 꺼내 주었다.
빙당호로를 빨며 다시 노인의 등에 업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노인은 어느 작은 무덤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절을 하거라.”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임자도 알지도 못하는 무덤에 절을 했다. 내가 절을 마치자, 노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덤의 규모는 작았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노인이 품에서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노인의 한모금은 특이하다. 남들처럼 꿀떡하고 목젖이 한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꿀떡, 꿀떡, 꿀떡, 꿀떡, 꿀떡, 꿀떡. 술병에서 입을 떼기까지 목젖이 몇 번이나 움직였는지 모른다.
후-
노인은 한참이나 무덤을 바라보았다. 나는 무덤을 바라보는 노인의 등이 달을 망연히 바라보던 노인의 등과 너무나 닮아있어 너무나 의아했다.

그렇게 큰 집은 난생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시끄럽고 요란뻑쩍지근 사람들이 북적대는 집도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산속에서 노인과 단둘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언제나 조용히 술을 마시거나, 그저 망연히 달을 보고만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는 오두막은 언제나 조용했다.
나는 처음에는 노인의 등에 업혔던 것 이상으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함과 호기심으로 곧 멀미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노인과 내가 기루에 들어서자 중년의 여인이 맨발로 뛰어 나왔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나와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나를 꼭 끌어안고 내 뺨에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서 내가 다녀온 무덤이 내 어머니의 무덤임을 전해 들었다.
내 어머니의 무덤을 정성껏 관리해준 것은 그녀였다.
그날 저녁 나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맛난 음식들을 잔뜩 먹였다. 밤이 깊어 나는 그녀의 포근한 품안에 안겨 꾸벅꾸벅 잠이 들었고, 곁에서 노인은 달을 보며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날 밤도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어린 나를 품에 안고, 중년 여인은 손바닥으로 자장자장 나의 등을 토닥이며…….


‘월하노인은 달을 보고 우네.’
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인은 사라졌다.
어느 순간 그가 사라졌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중년 여인은 나를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네 양부께서 다시 떠나셨구나. 구름처럼 머무를수 없고 바람처럼 붙잡을수 없는 분이니……."
나는 영문도 모르고 울었다.
‘우지마라 아가야, 이제 내가 네 어미가 되어주마.’
라고 품속에 나를 보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린 나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저기 달빛에 반짝이는 서호를 보렴."
여인이 섬섬옥수 고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것은 창밖의 서호였다. 달빛이 검은 수면에 부�혀 찬란하게 산란하고 있었다.   
"저곳 어딘가에 네 양부께서 천이 네게 남기신 정표가 있단다. 천이 네가 그것을 찾는 다면 양부께서 너를 부르마 약속하셨단다." 
그때서야 어린 나는 눈물을 거두고 여인의 따뜻한 품에 잠겨들었다. 
여인의 품이 한없이 포근했고 분 냄새가 향기로웠지만, 어쩐지 노인의 시린 등이 그리워 졌다. 한동안 나를 등에 없고 달리던 노인의 땀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東漢) 말년 왕윤의 가기(歌妓)였다. 그녀를 가리켜 천향국색(國色天香)이라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城之貌),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나온 고사다.
 초선의 아름다움에 달조차 부끄러워 구름 속에 숨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이른바 폐월(閉月). 그녀로 인해 권력의 정점에 선 두 사내가 서로에게 칼을 빼 들었고, 양아들이 양아버지를 죽이는 패륜(悖倫)을 저지르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 사라진 아득한 이야기 이다. 두 부자에 의해 더럽혀진 몸을 슬퍼하며 초선은 자결하였다. 폐월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먼 훗날 또 다른 폐월화(閉月花)가 항주에서 피어났다.

은퇴한 항주의 늙은 기녀 초선화에게는 그야말로 끗발 날리는 청춘이 있었다.
젊었을 때 그녀는 삼국지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절대 권력자 승상 동탁 과 그의 양아치 같은 양아들 여포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사이를 교묘히 이간질해서 두 사람을 파멸의 나락으로 이끈 초선만큼이나,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다고 해서 미녀 초선과 같은 꽃 초선화라 불리었다.

치명적인 미모.
가히 초선화의 미모는 그 이름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청순하면서도 교태가 넘쳤고, 쾌활하면서도 늘 고즈넉했다.
슬픈 듯 찡그리고 있다가 어쩌다 한번 활짝 웃을라치면 봄눈이 녹아내리는 듯한 따사로움과 아침 햇살에 꽃 봉우리가 만개하는 듯한 화사함을 지니고 있었다.
한때 그런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이 거덜 난 난 항주의 부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강하고 현명한 여자가 늘 그러하듯 초선화는 절대로 사내들을 믿지 않았다.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뿐 결코 마음을 주지도 않았다.
아비의 노름빚에 팔려 여덟 살에 주루에 팔려 시작한 기생 생활이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서는 불행이 아닌 행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과 열두 살 어린나이에 머리를 얹고 기생나이 환갑이라는 이십대에도 그녀는 항주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생이었고, 서른을 넘겨서도 그녀를 한번 품어보고자 논밭을 파는 멍청이 들이 끊이질 않았다.
비로소 나이 마흔이 되고서야 그녀는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비록 현역에서 은퇴한 퇴기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미모는 조금도 시들지 않고 청초했다.
그녀는 일생에 어떤 남자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그녀는 서호(西湖)의 한 자락에 촉석루라는 기루를 열었다. 촉석루는 오래지 않아 항주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기루로 꼽힐 만큼 크게 번성하였다.
장사가 너무 잘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촉석루가 단기간에 너무 번창하자 주위의 시샘이 집중되었고, 주변의 경쟁관계에 있는 기루들의 사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작은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기루의 호법을 모집하는 방을 붙였다.
조건은 단 두 가지였다.

一. 조금이라도 무공을 할 줄 알것.
二. 인상이 험악할 것.

보수가 후한 편이어서인지, 지원해 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딱히 마땅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초선화는 거래하는 술 도매상에 급히 찾는 전언을 듣고 갔다가, 도매상 입구의 계단 한가운데에 떡하니 엉덩이를 깔고 앉아 호리병에 입을 대고 술을 마시고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도매상의 늙은 영감은 초선화를 보자 주름이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그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쓸 사내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흘 전부터 하루에 술 한말만 주면 뭐든 한다고 저러고 있네. 그런데 우리야, 뭐 저런 무사를 쓸 일이 있겠나? 내 보기에 예사롭지 않은 인물 같으니, 초선화 자네가 거둠이 어떠한가?”
그는 인상이 험악하지도 무공을 할 것 같지도 않게 생긴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남자였다.
어쩐지 유약해 보이는 인상에 코끝에 길게 그늘이진 사내였다. 초선화가 보기에 그는 호법으로 쓰기에는 전혀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무공을 할줄 아는 사람을 구합니다.”
초선화는 허리를 숙여 사내와 눈을 맞추며 말했고, 사내는 대답대신 조잡한 천으로 아무렇게나 둘둘 감은 칼의 자루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