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 돌담옆에는 아름들이 밤나무가 가지를 길게 늘어 뜨리고 있었다. 밑으로 뻗은 것 중에서 튼튼한 것으로 골라 소고삐로 사용하던 밧줄을 매고 그 밑에 모래를 가득채운 마대푸대를 매달았다. "발끝으로 차지 말고 발등을 써라. 자~봐" 바짓가랑이를 훌훌 걷어 올린 송씨 아저씨는 고무신을 벗어 던진채 울퉁불퉁 알통이 불거난 다리를 힘있게 뻗더니 모래푸대를 향하여 연거퍼 몇차례를 퍽퍽 내지른다. 마대가 시계추 마냥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 반동으로 나뭇가지가 바람소리를 낸다. "주먹은 손끝부터 말아 쥐어야 한다. 잘못하면 손가락 다치니까."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밤나무 등걸을 투닥투닥 주먹으로 가격하며 신신 당부하는 말이였다. 2년전인가 이랫마실 손훈장님네 마름으로 들어온 송씨는 예전 어디선가 한가락 하던 사람 이라고 소문이 파다했지만 본인은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것은 우선 머슴답지 않는 그의 예리한 눈을 보면 허언 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해 여름 뒷 천방멩이소에서 멱감던 그의 울퉁불퉁 튀어 나온 가슴과 굳은 살이 박힌 주먹을 보고 내가 신기해 하자 "왜 너도 해보고 싶니?" 하기에 고개를 끄덕인것이 인연이 되어 그날 저녁때쯤 손수 만든 모래푸대를 들쳐메고 우리집에 와서 나를 불러 낸 것이다. 발차기와 주먹지르는 방법을 송씨 아저씨 따라 익히게 된 이것이 나의 최초 무술입문이 되 였고 그때가 중학교 2학년(1961) 때였다.
 (개산권(開山拳)-소림 간가권(看家拳)중의 한 초식으로 원래는 장법(掌法)이나 소림권법 에서는 장(掌)을 권(拳)으로 명칭하는 경우가 많다.이 후면장(後面掌)법은 당랑권의 광판장(光板掌)과 유사한데 원래 당랑권을 널리 전파한 당랑권사(螳螂拳師) 나광옥 (羅光玉)은 손바닥이 특출하게 커서 마치 한장의 널판지를 연상케 하여 그의 장법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좌권(左拳)으로 앞에서 공격하는 적의 턱을 치고 우장(右掌) 으로 � 상대의 낭심(囊心)을 가격한다)
***************** 태권도(跆拳道) 수련 *****************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6월 태권도장 청도관의 문을 두드렸다. 도장은 교동 화부산 밑 옛 한전터 옆이였는데 우리 중학교가 바로 근처여서 매일아침 저녁 으로 등하교때 마다 울려나오는 우렁찬 기합소리에 이끌려 도장 창문에 매달린채 가슴 두근 거리며 구경하면서 나도 언젠가 배우고 말겠다고 속으로 몇번이나 다짐했었다. 며칠을 어머니께 졸라 입관비와 도복값을 타냈다.다행히 그때는 매월 월말고사를 봐서 성적이 최고 우수한 학생에게 기성회비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4월5월을 거푸 1등 을 한 덕으로 어머니께 학비 내준 셈 치라고 졸은것이 효과를 본셈이다. 태권도는 처음 접한 내게는 환상 그 자체였다. 새하얀 도복의 멋도 최고였고 수도로 벽돌 을 몇장씩이나 격파하는 검은띠 맨 유단자들의 모습도 신비로웠다. 학교가 파하고 도장에서 운동한후 이십리길을 걸어서 집에 오면 늘상 캄캄한 밤이였지만 나는 즐겁기만 했다. 틈나는대로 평행봉과 역기를 들었고, 밤나무에 새끼를 동여맨 권대 (拳臺)를 두들기며 수도(手刀)와 정권(正拳)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 체형은 상체보다 하체가 더 견실한 관계로 발을 주로 사용하는 태권도를 익히기에는 적격인듯 했다. 발차기힘도 남보다 강했고 도약력(跳躍力)도 남보다 좋았다. 그러나 이런 내 체형 특성이 나중 발보다 권을 위주로 하는 18기 수련에는 적잖은 애로를 갖어올 줄은 그때는 짐작 못한 일이였다. 불행히도 겨우 석달을 다닌후 나는 도장을 나와야 했다.물론 그 이유는 관비(館費)때문이 였다. 그런차에 청도관에서 유단자였던 규율부장하던 3학년 선배형이 학교 빈교실을 활용 하여 태권도부를 지도하고 있었다. 도장을 못나가는 아쉬움을 그곳에서 메꾸며 다시 3개월 정도를 다녔을 즈음 더 이상 교실 사용이 불가능 하여 태권도부가 갑짜기 페쇄되는 통에 중단하고 말았다. 그후 태권도는 군에 입대하여 부산 병기기지보급창에서 근무하는 2년여동안 다시 접할수 있었다. 그때 1,21사태후 전군의 유단자화 훈련지침이 내려와서 매주 토요일은 부대내 전 장병이 태권도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내가 복무하던 인사행정과는 창(廠)내 태권도 시범조 로 편성되어 매일 일과후면 전망대 공터에 집합하여 맹훈련을 받았다. 군 태권도가 일반 태권도와 다른점은 적을 살상하기 위한 무술이라는 점인데 그래서 발차 기도 얼굴위까지 높히 차는게 아니라 낭심부위를 가격할수 있을정도로 훈련하고 품새 명칭 도 일반의 고려(高麗),금강(金剛).지태(地跆),일여(一如)등을 을지(乙支),충무(忠武), 계백 (階伯)등 역사상 유명한 장군들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파월(派越) 될때까지 2년여동안 우리 인행과원 전원이 2단인증을 받아 네차례 부대시범대 항에 출전했다.
. (야와라는 상대와 잡고 메치는 첩신박투(疊身撲鬪)의 기법이 주되는 관계로 도복은 유도복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천으로 만들었다. 등에는 영문으로 YAWARA 라는 글씨가 둥근 원안에 표기 되어있었는데 위의 사진은 처음 검은띠를 따고 기념으로 집 뒤 연무터에서 찍은 것으로 야와라의 대련시 기본자세인 '대타(對打)' 동작이다) ***************** 야와라(やわら) 수련 ***************** 야와라(YAWARA)는 일본에서 발달된 사무라이들이 사용하던 유술(柔術)이다. 합기유술(合氣柔術)의 맥(脈)인 대동류(大東流)가 뿌리로서 우리나라에는 해방직후 일본 다케다 문하에서 수련한 덕암 최용술 선생에 의하여 전파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도 만만치 않다. 고대 유술은 현대에 와서 걸고 던지고 메치는 기술을 토대로 한 유도(柔道)와 팔, 어깨등 관절을 제압하여 공격을 흘러내리는 기술이 특징인 아이기도(合氣道)로 갈라졌다 고 한다 상대의 접근을 피하는 법, 역습법, 절관을 꺾는법, 회전낙법등 그 기법이 270가지가 넘는데 우리 영동지방에는 그때 내가 수련하던 그 도장이 최초였다. 야와라 라는 무술은 나중 익힌 18기의 금라수(禽拏手)와 그 맥이 유사했다. 아미18금나(峨嵋十八擒拿)나 소림금사완(少林擒絲腕)등 18기의 호신술이 그것이 였다. 하기야 일본의 가라데(空手道)나 유도 등 모든 무슬이 중국 권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같은 기법이라도 야와라의 유술과 18기의 금라수는 그 술법이 완연히 달랐다. 적에게 손목을 잡혔을때 야와라는 먼저 내손을 비틀어 빼낸후 다른손으로 압박한후 상대의 손목관절을 위로 꺾어 제압하는 반면, 18기의 금라수는 잡힌손을 그대로 둔채 다른손으로 손목의 합곡혈(合谷穴)이나 팔등의 완맥(宛脈)을 잡은채 몸을 뒤틀어 팔을 뒤로 꺾은다음 넘어지는 상대의 목덜미를 무릎으로 눌러 완전제압하는 소귀탈혜(小鬼脫鞋) 초식을 비교하 면 쉬이 이해가 된다. 이는 무술(武術)과 운동(運動 Sports))의 차이를 명백히 말해준다. 운동은 형식을 중요히 여기지만 무술은 결과를 중요시 여긴다. 태권도에서는 대련시 상대의 몸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추라고 가르킨다. 이는 일본의 가라데도 마찬가지다. 몸앞에서 주먹을 멈추지 말라고 가르치는 최영의(崔永 宜)의 극진가라데(極眞空手)를 '실전가라데'로 분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각해 보니 원래의 야와라도 무술로서 시작되었겠으나 그때 내가 배운 야와라라는 무술은 세월의 변천에 따라 점차 운동쪽으로 변모된 것이라 여겨진다.
야와라도장은 화부산 밑 청도관 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었는데 관장은 태권도,합기도등 여러 무술을 설렵한 사람이였다. 나는 불행이도 합기도를 수련할 기회가 없어 그 무술의 심오함을 알지 못하지만 합기도장 견학이나 합기도 공개 심사대회등에 여러번 참석한 적은 있어 야와라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부족하나마 이해할수는 있었다. 열심히 수련하여 입관후 1년쯤뒤 입단 심사를 거쳐 검은띠를 매게 되었다. 도장에 다니면서 언별리 고향에다 지부을 설립하고 수련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야와라는 낙법이 많아 매트를 준비할수 없어서 수련생들에게 가마니를 수십장씩 가져오게 하여 그것으로 대신하여 운동하던 기억도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실내 수련장이 아닌 야외 공터를 연무장으로 삼았지만-
***************** 사바뜨(Savate) 수련 *****************
 사바뜨는 19세기 프랑스 군대에서 발로 엉덩이를 걷어 차는 기합이 발전된 것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무술이다. 화려한 발차기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프랑스 군 검술사범들의 기본 교과목으로 선택되어 군대와 학교 에서 널리 유행되고 있으며 1942년 파리올림픽에시법종목 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사바뜨의 발차기는 그 종류만도 100여 가지가 넘었다. 수련은 주로 족기(足技)기술 단련이 주축을 이루었고 차기(Kick)와 막기(Defence)와 걸기(Trip)로 기술이 세분화 되어있다. 사바뜨의 발차기는 그 높이가 중단(中段)정도이다. 원래 엉덩이를 차는 기술에서 발달되었 기 때문인데 도장의 샌드백도 다른 무술도장처럼 높히 매달지않고 허리정도로 고정되어 있 었다. 형(形)은 발차기 기술과 손기술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발기술 외에는 투렷한 특징을 찾아낼수 없었던것 같다. 남대천 다리 막건너 성남시장 입구에 있는 2층 도장이 였는데 물론 사범은 한국인이였다. 도장에서 구정사는 농과 최문현(이름이 정확한지 기억이 잘 않남)을 만났다. 그친구는 입관한지 3개월이 되었다고 하는데 황색띠를 매고 있었고 사범이 없을때는 관원 지도를 맡기도 했다. 사바뜨의 수련은 18기 수련과 병행했는데 나중 18기에만 전념하느라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 |